정완영님의 시조 모음
정완영
1919년 경북 금릉군에서
태어나 1946년 '시문학(詩文學)
구락부'를 발족하여
활동하였다. 1960년
<국제신보> 신춘문예에
작품 '해바라기'
당선,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골목길 담모롱이'입선,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조국祖國' 당선,
<현대문학>에
'애모愛慕', '강江',
'어제 오늘'로 천료되어
등단하였다. 이호우(李鎬雨)와 더불어
'영남시조문학회'
창립하였으며,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부회장을 지낸
바 있다. 금천시문학상(제2회), 가람시조문학상(제1회), 중앙일보
시조대상(제3회), 육당문학상(제5회), 만해시문학상(제2회)을 수상하였으며,
1995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받았다. 시조집으로「세월이
무엇입니까」「꽃가지를
흔들 듯이」「엄마목소리」「오동잎
그늘에 서서」「산이 나를
따라와서」등이 있다.
[리브로제공]
호박꽃 바라보며
어머니 생각
분단장 모른
꽃이, 몸단장도
모른 꽃이,
한 여름 내도록을 뙤약볕에
타던 꽃이,
이 세상 젤 큰 열매 물려주고
갔습니다.
― 돌아온 뻐꾸기가
지난해 짓다가
만 집을 올해도 다 못 짓고
아까운 꽃 시절도 낙화시절도
보낸 채로
늘어진 여름 한 철을
또 맞고야 말았구나.
돌아온 뻐꾸기가
저도 보기 민망했던지
후박나무 이파리 같은
푸른 날의 목소리를
우리 집의 용마루 위에
업어다가 자꾸 보탠다.
― 그래도 봄은
오네
세상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지만
그래도 오는 봄을 막을
수야 없잖은가
찬바람 붕대를 푸는
꽃가지를 보더라도.
― 봄이 찾아왔다는데
경부선 고속열차
미역줄기 같은 바람
바람도 봄바람엔 철로길이
휜다는데
황악산 안 갈 수 있나
진초록이 핀다는데.
― 서울의 버들가지
서울의 버들가지는
몸 풀기가 그리 힘든다
목숨도 짐짝 같은 중량교
넘엇길에
상기도 어두운 가지를
드리우고 섰는 버들.
― 연(蓮)과 바람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은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여
바람에 인경 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은가.
-조국(祖國)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 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 눈 내리는 밤 산과 들, 마을과 숲, 고목나무
가지까지 - 봄이 오고 있습니다 소리 소문도
없이 봄이 오고 있습니다. |
적막한 봄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 혼자 핀다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
구름도 제 풀에
지쳐 오도가도 못한다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 멀겠다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
- 을숙도
세월도 낙동강 따라 칠백 리 길
흘러와서
마지막 바다 가까운 하구에선 지쳤던가
을숙도 갈대밭 베고 질펀하게 누워있데.
그래서 목로주점엔 한낮에도 등을 달고
흔들리는 흰
술 한 잔을 落日 앞에 받아 놓으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술잔에 와 떨어지데.
백발이 갈대처럼 서걱이는 노사공도
강물만 강이 아니라 하루해도 강이라며
김해 벌
막막히 저무는 또 하나의 강을 보데.
-부자상(父子像)
사흘 와 계시다가
말없이 돌아가시는
아버님 모시 두루막
빛 바랜 흰 자락이
왠일로 제 가슴
속에 눈물로만 스밉니까.
어스름 짙어 오는
아버님 여일(餘日)
위에
꽃으로 비춰 드릴
제 마음 없사오며,
생각은 무지개
되어 고향길을 덮습니다.
손 내밀면 잡혀질
듯한 어릴 제 시절이온데
할아버님 닮아
가는 아버님의 모습 뒤에
저
또한 그 날 그 때의 아버님을
닮습니다.
-관악 봄 산은 늙었는데도 봄은
늘상 어린 걸까 |
-초봄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낸다
내일은
목련 꽃도 찾아와 구름 빛도
닦으리
-분이네
살구나무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 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89세
시인, 고향서 한국시조 부흥을 노래하다
원로 시조시인 정완영(89·사진) 선생은 요즘 주소지 서울보다 직지사 입구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정 시인의 고향인 경북 김천시가 10일 그의 호를 딴 ‘백수(白水)문학관’을 직지사 입구인 대항면 운수리에 개관했기 때문이다.
백수문학관은 3500여㎡ 넓이에 지하 1층, 지상 1층의 기와집으로 지어졌다. 그가 태어난 봉산면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전시실에는 유치환·박목월·박종화·김광섭·유진오 등 문인들이 시인에게 보낸 육필 편지가 진열돼 있다. 초·중·고 교과서에 실린‘조국’ 등 그의 대표 시조를 감상할 수 있다.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 마디 에인 사랑/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조국)
“남들이 좋다고 평가하는 작품과 자신이 애착을 갖는 작품은 다릅니다. ‘조국’은 출세작이긴 하지만 나는 ‘을숙도’와 ‘부자상’ ‘분이네 살구나무’를 더 좋아해요.”
문학관을 안내하던 정 시인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자기 작품을 가리키며 읊었다. 그는 귀가 조금 어두웠다. 시인이 남의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하면 동행한 딸 은희(54)씨가 다시 한번 말을 해줬다. 하지만, 목소리며 걸음걸이는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다. 전시실 건너편에 자료실·세미나실과 함께 마련된 집필실에서 여전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백수문학관은 문인이 생존해 있는 데다, 시조시인의 첫 문학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관이 만들어진 데 대해 “흡족하다”라고 하면서도 “이곳을 시조 중심지로 만들어 나가야 할 무거운 책무를 동시에 느낀다”라고 말했다. “웬만큼 할 일을 했으니 내일 죽어도 괜찮지만 1년만 문학관의 기틀을 잡아 놓고 싶다”라는 뜻도 밝혔다.
“시조는 민족문학이죠.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서구의 14행 소네트와 같은 민족적인 전통 율조죠. 시조란 우리의 정신이 배인 숨결이요, 기본 율조란 말입니다.”
정
시인은 고려 중엽부터 800여 년을 이어 온 한국 시조가 다시 부흥기를 맞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조는 결코 문학의 변방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지금껏 쓴 시조는 2000편 정도. 그는 요즘 시조에 관심있는 사람이 5만 명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이들 중에는 시조를 배우려 미국이나 중국·일본 등지서도 강의를 받으러 오는 이도 있다고 전했다. 그가 등단시킨 시조시인만 170여 명에 이른다.
그는 고향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백수라는 호도 ‘김천’의 ‘천(泉)’을 아래 위로 파자한 것이다. 젊은 시절엔 김천에 시조를 창작하는 ‘시조마을’을 만들려고 애썼다. 고향을 노래한 시도 많다. 3년 전쯤엔 고향에 내려오면 머물 집을 직지사 가까운 곳에 지었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 년 만이다. 그게 알려지면서 김천시가 문학관 건립을 서두르게 됐다. 고향과 시인, 참으로 어울리는 두 낱말이다.
♣ ♣정완영님의
시조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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